정재화 선교사 (파키스탄)

저희 가정은 올해 6월에 선교사역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30년 전 파송을 받을 때 주님 앞에 기도했었습니다.

그것은 선교로 30년 헌신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내 민족 고국의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달라는 소원이었습니다. 선교지에서도 늘 간절함과 때로는 안타까움으로 마지막 때 한국교회가 변함 없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기를 기도했습니다. 많은 것이 부족했고 연약했지만 대만과 중국 티벳 그리고 파키스탄 이란, 이런 나라를 거쳐가며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시고 힘 주신 주님의 신실한 인도하심이 고국의 사역 위에도 함께 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동안의 동역자 분들의 기도와 헌신이 없었다면 저희 가족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요? 두바이한인교회 목사님과 성도님들의 그 값진 섬김과 헌신은 분명 주님이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선교사라는 이유만으로 부족한 저희들을 위해 그 더운 여름 날 땀을 흘리시며 ‘두미페’로 섬겨 주시고 맛있는 식사를 준비하셨던 그 모습은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아무도 없는 저 깊은 히말라야 산골에 살 때도 저희 가족은 외롭지 않았고 지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잊지 않고 기억해 주셔서 그리고 기도해주시고 함께 동역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현지인 사역자가 현지인에게 세례를 주는 모습

현지인 사역자가 현지인에게 세례를 주는 모습

세례를 받기 위해 모여든 현지인

세례를 받기 위해 모여든 현지인

현지인의 모습들

현지인의 모습들

한두 마르와리 종족 사람을 리더로 세우는 안수

한두 마르와리 종족 사람을 리더로 세우는 안수

아래의 글은 저희 집 막내가 이번에 미국 기독교대학을 지원하면서 학교에 보낸 에세이입니다. 함께 나누고 싶어 올립니다.


There is still hope

“탕! 탕! 탕! 어둠의 정막을 뚫고 날카로운 총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너무 어렸던 나는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에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궁금해 창밖을 내다보고 싶었지만 부모님들은 급히 전등을 끄고, 문들을 잠그고, 커튼을 치고, 숨죽이며 또 다시 뜬눈으로 불안한 밤을 세우셨다. 며칠간 이어진 시아파와 수니파의 종파 갈등으로 아침만 되면 사상자들이 속출하고 결국 계엄령이 시작되었으며 온 마을 도로는 무장한 군인들과 장갑차로 전쟁과 같은 긴장감이 돌았다.

2002년 근본 무슬림 수니파 탈레반과 강성 시아파가 함께 사는 파키스탄 북부 히말라야의 깊은 산 골로 비즈니스 신분을 가지고 부모님은 선교를 시작하셨고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다.

9.11직후라 미국과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은 극에 달했고 곳곳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가 파키스탄 전역에서 쉬지 않고 일어났으며 오랫동안 선교사 자녀들을 교육했던 학교가 공격을 당해 가드와 여러 현지 학교 직원들이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도 발생했다.

대부분의 서구 선교사들은 선교를 중단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던 한국을 포함한 동양 선교사들이 그 빈자리를 채우며 무슬림 선교를 계속 감당해야만 했던 시기였다.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여러 오해들과 적대감을 갖고 대하는 탈레반으로 가득한 마을 중심에 부모님은 정착을 시작했다. 정부는 외국인인 우리가 신변에 위험이 될 수 있다며 가드를 두고 권총을 소지해야 한다고 알려주었지만 부모님은 이웃들이 비록 위험할 수는 있지만 총을 겨누어야 하는 적이 아니라 앞으로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이웃으로 보았고 주님의 보호하심을 전적으로 믿었기에 다 거절하셨다고 했다.

엄마는 현지 여인들과 같이 옷을 입고 온몸을 히잡으로 가리고 외출하셨고 이웃들을 위해 할랄푸드(무슬림 정결음식)를 준비하며 현지인의 삶을 존중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우리집은 언제나 이웃에게 오픈되었고 거의 매일 같이 이웃들이 찾아와 엄마가 정성스럽게 만든 한국음식을 나누고 우리의 삶을 보여주며 경계심과 기독교인들에 대한 오해도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성탄절이 되면 먼저 수니파 친구들 그 다음날은 시아파 이웃들을 초대하여 선물과 성탄카드를 나누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고 함께 예수님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도 보았다. 서서히 우리 가족을 향해 마음을 열며 서로를 진심으로 대하는 좋은 친구들을 갖게 되었고 그 중 한 가족은 우리가 그 산골 마을을 떠날 때까지 11년간 우리 가족을 모든 위험에서 보호해주었다.

형과 누나와 나는 산골마을의 작은 현지 학교를 다녔다. 우리만이 유일한 기독교 학생이었기에 때로는 무슬림 선생님들과 학생들에게 기독교인들에 대한 혐오 발언과 따돌림으로 어려움을 당하며 어린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부모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선생님들과 많은 대화를 통해 미움이 아닌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관계로 발전시키며 신뢰를 쌓아가셨다.